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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9월호 신작 특집. 손나래 <각에 대한 생각> <물고문>

손석만 2019. 9. 17. 22:43

각에 대한 생각 외 1편 손나래

 -상자

 

   모가지를 버리고 모서리로 태어났어요! 모서리가 다 닳으면 모가지가 될까요?

 

   상자에도 모서리가 있어요 모서리가 상자고요, 말도 마세요 어디를 가나 모서리상자뿐이에요

   우리는 아이들처럼 상자놀이를 늘 하죠 아침이면 모서리상자를 벗고요 저녁이면 모서리상자를 입고 난리에요

   자세히 보세요

 

   어디를 가나 모서리상자들뿐이잖아요 상자가 상자를 품고 있고요 아니 상자가 알을 슬고 부화를 시켜 온통 모서리상자 천지예요

   위를 한 번 보세요

 

   그리고 아무리 모서리상자를 입고 벗고 하지만 모서리상자를 너무 많이 입은 사람은요 모서리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기도 하고요 모서리상자를 입지 못한 사람, 모서리 바닥에서 상자를 깔고 죽어요

   보세요 바닥도 전부가 모서리이에요 그런데 바닥은 참 친절하네요 모서리바닥은 어깨동무하고 있어요

   어디를 가던 바닥은 바닥을 받아주는 모서리에요

 

   또 자세히 보세요

우리는 모서리와 상자 사이를 걸어 다녀요 동무하고 있는 상자 사이를요 걷다 보면 모두가 모서리뿐이에요

   모서리는 위험해요 모서리는 각이 살아있어요 모서리를 돌 때는 감정을 자제하세요 모서리에는 함정이 있어요

   그러니까 모서리마다 생명보험 하나씩 들어요

   아주 좋은 모서리상자를 입기 위해서죠 좋은 상자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선택에서 각도를 잘 꺾으세요 미로의 꿈속을 헤맬 수도, 냉동창고 각진 고깃덩어리에* 어깨를 기댈 수도 있어요

 

   또, 또 자세히 보세요

   달팽이는 집채만* 한 상자를 등에 지고

   세상을 디밀고

   와우각에서는 우주가 접수되고 있네요

 

  *송찬호 시.「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에서

  *정호승 시.「달팽이」에서

 

 

    물고문

 

 

   남해안에 문어 떼가 출몰했다 돌대가리 문어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과 삿갓을 쓴 문어들

   중에는 긴 빨대가 뭍으로 뻗었다

 

   등에 가시를 박은 바다거북이 있었다 파이프를 입에 물고, 물 건너온 문어 대가리를 잡고 물고문 했다

 

   연기를 휘날리며

 

   돌대가리 머릿속에는 먹물은 없고 짠물만 시버렁거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은 콧물인지 눈물인지 소음이 지독했다

   그래도 삿갓 문어는 삿대질로 먹물을 짖어댔다

 

   해수면이 심한 기침을 토하고 파도가 재앙으로 출렁거렸다

 

   먹물을 다 쏟은 문어들, 물속에서 타이타닉이 허리를 꺾고 바닷속에 처박히는 것처럼 아귀와 다툼을 벌였다

 

   남해안에서 일어난 물고문 사건은 말을 타는 바람이 전국을 강타했다

이 소식에 혼비백산 줄을 붙잡고 육지로 기어오른 문어들, ‘박종철’ 물고문 치사 사건의 ‘오공 대공수사단’보다 더 무서워 떨었다

 

   물을 잔뜩 먹고 배가 부른 문어들, 육지의 ‘자라’만 봐도 물을 토했다

 

   (그래도 아직까지 문어들은 흰옷에 먹물을 뿌리고 있다)